1. 나주 구진포 장어거리

 

소개

영산강 하구가 둑에 막히면서 자연산 장어가 거의 잡히지 않지만, 나주의 구진포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지역이어서 예로부터 장어가 유명하다. 특히 구진포 장어는 미꾸라지를 먹고 자라기 때문에 맛이 뛰어나다. 구진포삼거리를 중심으로 7~8곳의 장어집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부분 1940년대에 들어선 집들이라 비슷한 수준의 맛을 낸다.

* 구진포는 영산강 물길이 구부러지는 곳에 있는 나루라 해서 ‘구부나루’라 불렸다. 예전에는 영산강의 물이 앙암바위를 돌아 이곳에서 모여 다시 굽이친다 해서 회진포라고 불렀다.

위치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구진포로 92

 

2. 일본인지주가옥

 

소개

일제강점기에 나주 지역에서 가장 많은 농토를 보유했던 일본인 대지주 구로즈미 이타로의 가옥이다. 1935년경 건립되었다고 알려져있으며, 청기와 등 모든 건축자재를 일본에서 운송하여 지었다고 한다. 현재 나주시노인복지관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역사 갤러리를 통해 19~20세기 영산포 일대의 옛 사진과 당시 시대상황을 알 수 있는 사진이 전시되어 있으며, 전통 찻집과 지역주민 추억의 사진관을 운영하여 지역주민 및 관광객들에게 친교와 휴식의 장소를 제공하고 세대간 추억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위치

전라남도 나주시 예향로 3871-4

 

3. 나주 순교성지

 

소개

나주 순교성지는 기해박해(1839) 때 나주에서 순교한 이춘화(1807~1839베드로)와 병인박해(1866~1871)때인 1872년에 순교한 강영원(바오로,1822~1872), 유치성(안드레아, 1825~1872), 유문보(바오로, 1822~1871) 등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순교자 기념 경당이 자리한 곳이다. 경당 입구에는 60톤의 거석과 관 모양의 제대가 있고 경당 내부는 사방이 막혀있고 위쪽만 뚫려 있다.성당 내에는 초대 나주 본당 신부인 하롤드(헨리, 1909~1976) 대주교가 초대 주임 시절에 쓰던 타자기를 비롯해 기도서, 십자가, 성합, 제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는 기념관이 있다. 그리고 교육, 의료 등 자선을 통해 복음화에 앞장 선 까리따스 수녀회 한국 첫 본원이었던 한옥 기와집이 복원되어 당시 수녀들의 각종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인근에 그들이 순교한 장소인 무학당 순교터(현 나주초등학교 정원 내)가 있고 무학당 주춧돌로 추정되는 10여 개의 돌이 130여 년 동안 현장에 보전되어 오다가 2001년 나주 성당으로 옮겨 그 위에 무학당을 상징하는 구조물로 건립되었다.

위치

전라남도 나주시 박정길 7-40

 

 

 

4. 나빌레라 문화센터

 

소개

나를 위한 문화 휴식 공간
일제 폐산업시설이 나주 나빌레라 문화센터로 재탄생했다. 나빌레라 문화센터는 문화체육관광부의 폐 산업시설 문화재생 공모사업어 선정되어 지역민을 위한 문화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하면서 2017년도 10월에 개관했다. 기존 건물 6동에 전시실 및 소극장 등 문화예술을 위한 다양한 공간을 조성했다. 또한, 목수김씨전, 대한민국 천연염색문화상품대전 수상작 전시 등 다양한 전시 관람이 가능하다. 나주 구도심과 혁신도시를 이어 스마트 생태도시를 구현해줄 나빌레라 문화센터의 변화를 기대해본다.

위치

전라남도 나주시 나주천1길 93

 

5. 영산포 홍어거리

 

소개

영산포 홍어는 굽이굽이 영산강 뱃길을 따라 올라와 닻을 내리면 잡힌 홍어가 먼 뱃길을 따라 올라오는 사이에 자연발효되어 독특하고 절묘한 맛을 내는 웰빙 식품이다. 옛 영산포구가 있던 자리에 40여 곳의 홍어음식점과 도매상이 들어서 있다. 홍어거리에 들어서면 퀴퀴한 홍어 냄새가 진동한다.

고려 말 흑산도를 비롯한 전라도 섬에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늘 생명의 위협을 받고 살던 섬주민들이 강을 따라 뭍으로 거슬러 왔는데, 그곳이 바로 나주의 영산포였다. 특히 흑산도 주변 영산도에서 피신 온 사람들이 많아 마을 이름이 영산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들은 육지로 왔음에도 어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흑산도 인근에서 고기를 잡아 배에 싣고 돌아왔는데, 더운 날이면 다른 생선은 썩어서 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홍어만은 먹어도 아무런 탈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삭힌 홍어는 영산포의 특산물이 된 것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는 “나주인들은 삭힌 홍어를 즐겨 먹는데, 탁주 안주로 곁들여 먹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치

전라남도 나주시 영산포로 205-7

 

6. 영산포 등대

 

소개

* 국내 유일의 내륙 등대, 영산포등대 *
일제강점기 영산강의 가항종점인 영산포 선창에 건립된 등대이다. 1915년 설치된 시설로 수위 측정과 등대의 기능을 겸했다. 이 등대는 우리나라 내륙하천가에 있는 유일한 것으로 1989년까지 수위 관측시설로 사용되었다. 영산포 선창은 1960년대까지 각종 선박이 왕래하면서 많은 수산물들이 유통 되었다. 특히 산 홍어와 추자 멸치젓배가 왕래해 지금도 선창가에는 어물전들이 남아서 그 옛날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 바다 아닌 강을 밝히는 유일무이한 영산포등대 *
운하가 발달한 외국에서는 강가에서 등대를 발견하는 일이 특이한 것만은 아니다. 바닷가에 면한 해항(海港)이 있다면 강가에 면한 강항(江港)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내륙운하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내륙의 항구들이 많다. 운하가 발달하지 못한 우리나라에도 강가 등대가 있는 곳이 있으니 전라남도 나주의 영산포가 그 곳이다. 아마 강가 등대로는 유일무이한 곳이니, 지금은 비록 영산강 뱃길이 끊겨서 제 구실은 하지 못하지만 아직도 의연하게 남아있어 그 옛날 고깃배들이 드나들며 흥청거렸던 시절을 웅변해 주고 있다. 이 영산포등대는 홍어와 깊은 인연을 지니고 있다. 봄바다에 진달래 꽃빛이 드리울 무렵이면 홍어의 북상이 시작된다. 한류성 어족인 홍어가 남쪽 바다에서 자취를 감추면 봄이 완연하다는 증거다. 《자산어보》에도 “동지 후에 비로소 잡히나 입춘 전후라야 살이 두껍고 제 맛이 난다. 2~4월이면 몸이 쇠약해져 맛이 떨어진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도 홍어주산지는 흑산도 근해였다. 요즘 사람들도‘흑산도 홍어’를 입에 달고 산다. 당연히 흑산도를 홍어 문화의 본산지로 안다. 그렇지만 홍어 식도락 문화의 본향은 흑산도가 아니라 영산포다. 흑산도가 원생산지라면 영산포는 최종 가공처라고나 할까. 잡힌 홍어들이 배에 실려 굽이굽이 영산강 뱃길을 따라 일주일여를 올라와 옛 남도의 물류거점이었던 영산포에 닻을 내리면 어느새 홍어는‘푸욱’ 발효되어 예의 ‘썩은 홍어’가 되고 만다. 냉장시설이 없던 시절, 먼 뱃길을 따라 영산포까지 올라오는 사이에 자연 발효돼 독특하고 절묘한 맛을 연출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이야기 한 마디. 흑산도 사람들은 삭힌 홍어를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본디 먹지도 않았다. 흑산도 예리포구에서 만난 뱃사람들은, ‘흑산도에서는 삭힌 홍어 안먹지라. 당신이라면 금새 잡은 싱싱헌 놈 놔두고 그걸 먹겠소?’라고 한다. 싱싱한 것을 먹지 못하는 먼데 사람들이나 먹던 것이 그만 별미가 되고 말았다는 말이다. 실제로 흑산도에 가면 싱싱한 홍어를 생물로 맛볼 수 있다.‘흑산도홍어’의 진실을 확실히 알아야 할것이다.

* 영산포와 흑산도의 관계 *
영산포는 흑산도와 뗄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고려말 왜구들이 노략질을 할 때마다 도서 지방의 피난민들이 영산강을 거슬러 이곳에 와 머무르곤하다가 아예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흑산도 앞 영산도 사람들이 몰려와 살면서 ‘영산포’라는 지명이 붙었다. 섬과 강변, 바다와 강은 이렇게 하나로 연계되었다. 정작 흑산도 사람들은‘싸하게 썩힌’ 홍어보다 생물(生物)을 좋아한다니 역시 홍어문화의 원조는 영산포임에 틀림없다. 영산강을 이용한 수운의 발달은 영산포라는 새로운 도시의 발달과 지역경제의 발달을 가져왔다. 사실 영산포는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러나 이미 고려시대에 조운제도에 의하여 영산포에 진이 설치되었고, 조선시대에 다시 조창제도가 부활하면서 세곡을 거두어 저장했다가 서울로 운송하는 국영창고인 영산창이 지금의 영산포 택촌마을에 설치되었다. 이 영산창은 전남 17개 고을의 세곡을 모아서 저장하던 곳으로 53척의 크고 작은 배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영산창은 수로가 길고 험난해서 해상사고가 많이 났기에 1512년에 영광의 법성창으로 옮겨진다.

다시금 영산창이 주목받은 것은 한말부터이다. 조운선이 진을 치고, 남도의 숱한 어선들이 모여들어 도회를 이뤘던 영산포에는 홍어 뿐 아니라 흑산도·낙월도 등지에서 올라온 소금과 온갖 해산물이 철철이 산을 이뤘고, 이 ‘갯것’들은 ‘염질’을 거쳐 광주 등 내륙의 대처로 팔려나갔다. 그 당시의 지도를 보면, 제포(薺浦)라는 포구가 보이고 포촌(浦村)이라는 포구명칭이 적혀 있다. 수심이 3발(三丈)인데 조류가 올라오면 4발(水深三丈潮入則四丈)이라고 한 것을 보면 서해의 조류가 강을 따라 이곳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정확한 증거이다. 상선(商船)이란 설명이 붙은 배들이 여러척 그려져있고, 강가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미루어보아 강상루트의 통행량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 초반에 영산포의 새 주인은 일본인들이었다. 조선사람들은 북쪽 포구에 집단촌을 형성하였던 반면에 일본인들은 남쪽에 새로운 포구를 만들었다. 1904년 평남환(平南丸)이라는 10톤급 발동선이 목포와 영산포 간을 운행하면서 종전의 18시간 거리가 5~6시간으로 단축된다. 강을 따라 배들이 모여들고 영산포에는 예전에 없던 5일장도 들어선다. 일본인들이 정착한 것도 이같은 유리한 조건을 십분 감안하였기 때문이다. 오일장을 중심으로 일본인 상가거리가 들어서고 일본식 명칭인 은좌(銀座) 거리도 생겨난다. 영산강 일대의 최대의 쌀 집결지인 영산포의 쌀값 동향을 재빨리 목포의 상인들에게 알리려는 목적에서 우체국도 들어선다.

* 영산포 등대의 어제와 오늘 *
1906년에는 오늘날의 영산포여자중학교 자리에 일본인 소학교가 들어서고, 전남 내륙에서 는 최초로 영산포 일본인회도 창설된다. 1907년에는 영산포 헌병분대, 1908년에는 광주 농공(農工)은행 영산포지점, 1910년에는 일본인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寺) 포교소와 일련종사(日蓮宗寺) 등이 들어선다. 국권침탈 이후, 1914년에 영산목교(榮山木橋)가 건설되고 1915년에 호남선철도가 개통되면서 영산포역이 생겨난다. 그때쯤 등대가 들어서는 것이다. 일제는 너르디 너른 나주평야의 쌀들을 영산포에 모았다가 일본으로 실어 보냈고, 지금도 남아있는 정미소 건물은 이런 수탈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호남, 특히 나주 일대의 기름진 곡창에서 거두어들인 쌀이 산처럼 쌓였다. 영산강 하구의 목포와 쌍벽을 겨루던 침략의 대상이기도 해 당시 동양척식회사의 문서고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온갖 상품을 파는 상가들이 즐비하고 게다신은 일본인들이 거리를 오갔다. 영산강을 따라서 배에 실려온 홍어들은 포구에 내려지고, 다시 광주로, 나주로, 담양으로 팔려나갔다. 홍어의 전파과정에 서 영산강의 위력이 대단함을 알 수 있다.

그러다보니 등대까지 생겨났다. 등대는 바다의 상징이다. 누구나 그렇게 아는 바다의 등대가 이곳 영산포에는 바다가 아닌 강에 서 있다. 유일의 강변 등대다. 이미 1915년에 설치됐는데, 그 시절 얼마나 많은 배들이 몰려 들었으면 여기에 등대를 세웠겠는가. 그 관록의 강변에는 지금도 홍어집들이 즐비해 옛날의 영화를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영산강은 이름만 옛 강이로되 사람도, 풍광도 옛 것이 없다. 하구언이 막히면서 물길이 끊겨 ‘끝발 날리던 포구’의 영화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육로와 철로의 발달은 수운의 침체를 유발하였고, 1970년대 국토개발계획에 의한 영산강 하구언 건설은 영산포의 완벽한 몰락을 가져왔다.

그러나 불이 꺼진 영산포 등대에도 서광이 비추이고 있다. 조심스럽게 영산강하구언을 철거시키거나 재조정하여 다시금 영산강의 젖줄에서 수운을 살리려는 노력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주시에서는 영산포의 선창을 다시 복원하는 ‘근대거리 조성계획’을 수립중이며 당당한 문화유산으로서 뒤늦게나마 재인식하고 있는 중이다. 등대도 영산포의 명물로 거듭나고 있다.

위치

전라남도 나주시 등대길 80

 

 

 

7. 나주 철천리 마애칠불상과 석조여래입상

 

소개

* 철천리의 두 개의 보물 석상, 철천리 마애칠불상과 철천리 석조여래입상 *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에 있는 철천리는 뒤로는 봉황의 명산인 덕룡산이 있으며, 마을 앞에 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자연마을로는 철야, 수각, 유촌, 선동마을 등이 있다. 이 마을에는 각각 보물 제461호와 보물 제462호로 지정된 마애칠불상과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 나주 철천리 마애칠불상 *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62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4각에 가까운 원추형(圓錐形) 바위가 있다. 여기 바위 전면에 불상을 조각하였다. 바위 정상에는 동자상(童子像)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없다. 동면에는 좌상(坐像) 1구가 있고 북면에도 좌상 1구가 있는데 합장(合掌)하고 있다. 남면에는 4구의 입불이 있는데 모두 수법이 비슷하다. 또 서면에는 원래 2구의 불상이 새겨져 있었다고 전하지만 일제강점기에 광부(鑛夫)들이 떼어냈다고 전한다. 이들 불상들은 모두 소발(素髮)의 머리에 육계가 명확하며 얼굴의 세부(細部)는 뚜렷하지는 않으나 윤곽이 분명하고 우아한 편이다. 그러나 체구는 빈약하고 굴곡도 표현되지 않았으며 신체의 구분, 옷 무늬 등 선 처리에 있어서도 너무 도식적이다. 좌상과 입상이 모두 비슷한 크기이며 발아래에는 1단의 돌출부를 마련하여 자연대좌를 이루고 있다. 지금은 7불이지만 없어진 서면 불상까지 합하면 9불이 된다. 원추형 비슷한 4면석에 다수의 불상이 비스듬하게 조각된 예는 극히 드물며 또한 이렇게 4면 불을 조성한 예 역시 우리나라의 귀중한 불상의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이 불상은 일부에서 전형적 양식의 퇴화가 엿보이며 기법의 둔화, 의문(衣紋)의 도식적(圖式的) 처리 등으로 보아 12∼13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미륵사는 백제 성왕22년(544) 연기조사가 구례 화엄사와 함께 창건하였는데 임진왜란때 소실된 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되었다고 전해오며 당초의 절 이름은 창룡사였다고 한다. 옛날에는 불상의 동자상을 돌려서 잘 돌아가면(또는, 돌가루를 먹으면) 아들을 낳는 다는 속설이 있어 여인들이 치성을 드렸다고 전한다. 1999년 용화전(29.4평)을 새로 지었다.

* 나주 철천리 석조여래입상 *
이 불상은 5.38m나 되는 거불(巨佛)로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과 동일석으로 조각되었다. 소발(素髮)의 머리에 육계가 큼직하고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우며 둥글고 도톰 하다. 눈은 길고 코는 크며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보이나 생동하는 불상의 미소는 보이지 않는다. 또 귀는 긴 편은 아니며 삼도가 표현되었으나 형식적이다. 신체는 괴량감이 충만하고 당당하나 어깨는 부자연스러우며 굴곡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수인은 시무외인, 여원인인데 어색하다. 발목 이하는 땅에 묻혀서 알 수 없는데 원래는 이중대좌였다고 전한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이며 의문(衣紋)은 원호(圓弧)를 그리면서 발목까지 내려오는데 V자식 의습이다. 광배(光背)는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이며 2조의 신광과 두광으로 구별되고 있다. 두광 안에는 머리 주위를 연화문으로 돌리고 그 사이에는 화문을 장식하였고 신광 사이에는 구름무늬(雲紋)을 새겼다. 이 석불은 얼굴의 비만감 또는, 괴체화(塊體化) 되어가는 신체적 조형 및 형식적인 의문 등이 보이나 상호에서 보여주는 강한 인상 촘촘하게 주름진 활달한 의습 아직도 전대에서만 볼 수 있는 당당한 어깨 등은 당대의 저력과 힘을 충분히 살려준 작품으로 고려시대 초기부터 유행하던 거불 양식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조성연대는 10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현재 철천리 마을의 나지막한 산정에 위치하고 있는데 근처에 미륵사란 조그마한 암자에서 이 불상을 모시고 있다. 옆에는 보물 제461호인 칠불석상이있다. 이곳 봉황면 지역은 백제때는 실어산현(實於山縣) 통일신라 이후 조선초까지 철야현(鐵冶縣)이 있었던 지역이다. 치소는 바로 이웃한 철야마을이다.

[문화재 정보]
* 철천리칠불석상
지정종목  : 보물  
지정번호  : 보물 제461호  
지정연도  : 1968년 6월 10일  
시대  : 고려  
종류  : 불상  
크기  : 높이 95cm

* 철천리석불입상
지정종목  : 보물  
지정번호  : 보물 제462호  
지정연도  : 1968년 6월 10일  
시대 :  고려  
종류  : 불상  
크기  : 높이 5.38m

위치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 산124-11

 

8.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소개

* 일제강점기 학생운동의 산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
나주 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당시 나주역에서 나주-광주 간 기차를 이용해 통학하던 한, 일 학생의 충돌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학생독립운동은 흔히 일제강점기 3대 독립운동의 하나로 평가된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은 학생독립운동 진원지 ‘옛 나주역’ 옆에 당시의 역사를 생생하게 일깨울 수 있도록 전남지역의 식민지적 상황과 학생독립운동의 전개과정 등을 주제로 2008년 7월 25일 개관하였다. 더불어 이곳을 방문하게 되면 전라남도 기념물 제183호로 지정된 나주역사도 함께 볼 수 있다.

* 광주학생독립운동진원지 나주역사 *
1913년 7월 1일 호남선 개통에 따라 신축된 건물로, 1929년 10월 30일 일본인 남학생과 조선인 남학생의 편싸움을 발단으로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의 직접적인 빌미가 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신축 당시의 설계 등의 기록이 없어서 원래의 규모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1923년 북쪽 벽에 이어 화물창고를 증축하였고, 1970년 본건물의 지붕을 이은 일본 기와를 슬레이트로 바꾸었으며, 개찰구 위치를 변경하였을 뿐 기본 구조나 기둥 등 목재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위치

전라남도 나주시 죽림길 26

 

9. 나주배박물관

 

소개

나주배는 1430년 세종실록지리지 나주목편에 토공물로 기록되어 품질의 우수성을 과시하였고, 옛날부터 많은 농가가 배를 재배하여 왔으며 1967년부터 세계 여러나라에 수출해오고 있다. 나주배박물관은 나주배를 널리 홍보하고, 재배역사, 민속자료 등을 수집 보존 전시하여 후손들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코자 1992년 4월 20일 개관한 세계유일의 배전문 박물관이다.

위치

전라남도 나주시 금천면 영산로 5838

 

 

 

10. 동신대 카메라박물관(문화박물관)

 

소개

세계의 카메라를 만날 수 있는 공간, 동신대카메라박물관
동신대학교 문화박물관 내에 설치된 국내 최초의 카메라박물관이다. 원로사진작가 이경모(동신대 사진예술학과 객원교수)선생이 평생 수집한 세계각국의 카메라 1,500여대를 기증하여 1996년 11월 11일에 문을 열었다.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카메라
현재 총소장품은 1,599점이며 이중 350여대를 기획, 전시하고 있다. 독일의 라이카, 콘택스 카메라를 비롯하여 일본, 미국, 유럽국가 및 옛 소련, 중국, 북한, 한국 등 세계 여러 나라의 카메라가 비교 전시되어 있다.

종류별로는 1900년대 초부터 1930년에 걸쳐 제조된 목제 폴딩카메라와 초점렌즈, 수중 및 항공·스테레오 카메라 등이 전시되어 있고, 그밖에 이경모가 여수·순천사건과 6·25전쟁중 종군하며 촬영한 기록사진, 광양지역의 흑백 풍경사진, 기타 문화재 사진 등이 상설 전시되어 있다.

위치

전라남도 나주시 건재로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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